우리가 이 곳에 무리없이 적응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.
하나는 젊다는 것, 다른 하나는 가진 게 없다는 것.
우리에게는 아직 차가 없다. 앞으로도 없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지만, 시골에서 트럭 한 대 없이 농사를 짓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. 아침저녁으로 돌봐야 하는 논이며 밭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데다 짐이며 사람이며 옮기든 나르든 하려면,
차는 필수다.
5개월 동안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살았다. 트럭도 참 여러 번 빌려타고 얻어타고 아저씨들께 신세를 많이 졌다.
비 오는 날은 이래저래 어려움이 있지만, 그래도 오토바이가 있어서 제법 괜찮았다.
그런데 오토바이마저 고장 나 강화에 보내고 난 후, 오토바이를 타던 짝꿍이 자전거를 타게 되고,
자전거를 타던 나는 주로 집 근처에 머물렀다.
어제는 오랜만에 비가 그쳤고, 짝꿍은 벼르고 별렀던 논김을 매러 나갔다.
물론 자전거를 타고서.
나는 호랑이 플레이어 수거하러 고구마밭에 갔다.
물론 걸어서.
갔다가 김도 좀 매고 짝꿍이 있는 논으로 가서 일을 좀 하다가 택배 물건 찾으러 선창에 갔다.
자전거를 타고서.
맨발로 논김을 맨 데다 고인 물도 여러 번 지나가서 티셔츠 뒤로 진흙물이 엄청 튀었지만,
뭐 어쩌겠나 싶어 그냥 다녔다. 별로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. 일하면 다 그렇게 엉망 되는 거니까.
물건을 찾아가지고 돌아가려다 매표소 한 사장 아저씨랑 잠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, 자전거를 타고 나왔느냐고, 물건 보내달라고 그러지 그랬느냐고 (짝꿍한테 시키라는 말씀이었는지, 다른 방도를 찾아보라는 말씀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) 무척 안쓰러워 하셨다. 괜찮아요, 괜찮아 ^^ 한 손으로 제스처까지 써 가며 인사드리고 출발할 때까지도 아저씨의 걱정스런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.
흠? 나는 괜찮은데, 심지어 선창으로 내려오는 내리막길이 길어서 신난다 하고 온 참이었는데, 다른 분들 보기에는 그렇게 안타까운 상황이었나? 오르막길에서 낑낑대긴 해도, 오늘은 끌지 않고 올라갈 수 있을까? 한 번 덤벼보자, 뭐 이런 생각을 하는 나로서는 웃으면서 정말 괜찮다는 말을 전할 도리 밖에는.
짝꿍은 자전거 타고서 집으로 가라고 했지만, 혼자 몇 시간 일한 아이를 차마 걸어서 오라고 할 수는 없어 다시 논으로 갔다.
자전거를 놓고 집까지 걸어오는 데 35분 정도 걸렸다.
아주 천천히 걸어서.
걷는 동안 안개가 점점 짙어졌고, 나는 백로와 왜가리와 해오라기를 보았고, 졸다가 발걸음 소리에 놀랐는지 후드득 거리며 수직으로 날아오르는 오리를 보았으며, 올해 첫 달맞이꽃을 만났고 가락지나물인지 미나리아재비인지를 보았다.
우리에게 조만간 중고 트럭이 생길 지도 모르겠다.
차 없이도 잘 살고 있다는 자부심과 약간의 낭만을 편리함과 맞바꾸게 될 거다.
생존에 필수적인 면이 있어 단순히 편리함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긴 하지만.
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걱정은 더 커질 테고.
결국은 선택인 거고, 갈수록 선명한 것은 줄어든다.
그것이,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변명을 늘려가는 것만은 아니기를 바랄 뿐인데, 잘 모르겠다.
오솔길에 어울리는 건 역시 자전거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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